“쓰는 인간”은 인류가 기록을 통해 사유하고 창조해온 역사를 탐험한 책입니다. 롤런드 앨런의 깊이 있는 전개와 손성화 번역가의 섬세한 언어가 어우러져, 우리는 글쓰기와 기록의 본질을 새롭게 마주하게 됩니다.
서론 – 기록이란, 인간다움에 대한 질문
우리가 기록을 남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정보를 저장하기 위해서일까요? 롤런드 앨런의 『쓰는 인간』은 이 질문을 시작점으로 삼습니다. 손성화 번역가는 담담한 문장으로 이 책의 철학적 깊이를 전달하며, 독자가 ‘쓰기’라는 행위 자체에 대해 다시 사유하도록 이끕니다. 이 책은 기록을 단순한 방편이 아닌, 사유와 창조의 근원이자 인간다움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라고 정의합니다. 우리는 왜 쓰는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우는가, 나의 기록이 누구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가. 이 책은 그런 질문 앞에 독자를 세웁니다.
1. 기록의 시작 – 기호에서 문자가 되기까지
인류 초기의 기록은 그림이거나 상징화된 기호였습니다. 알타미라의 동굴벽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 이집트의 상형문자처럼, 뜻을 담은 모양으로 구성된 기호들은 미지의 개념을 형상화하려는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앨런은 이를 ‘사유의 시각적 확장’이라 표현합니다. 즉, 머릿속에 머무르던 생각과 경험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꾼 것입니다. 이는 곧 ‘기호’가 ‘문자’로 발전해, 단어나 문장, 문학 작품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을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사유의 시각화 과정은 단순한 기호 사용이 아닌, 인류가 내부를 외부로 내보이는 커다란 전환점이었습니다.
2. 중세의 기록 – 수도원과 필사 과업
중세의 수도원 필사본 작업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일종의 사유 수행과도 같았습니다. 수도사들은 성경, 고전, 철학 문헌을 한 자 한 자 손으로 옮겨 적으면서 각 문장마다 이해와 묵상을 곁들였습니다. 앨런은 이를 “문자를 필사하는 매 순간이 일종의 내면적 독백”이라 봅니다. 수백 년간 전해진 필사본은 당시 기록자가 느낀 경외와 정성, 사유가 종이에 고스란히 남은 결과입니다. 필사는 글을 따라 읽는 것뿐 아니라, 이해하고 내면화하는 작업이었으며, 수도원은 단순한 복사 공장이 아니라 사유의 공간이었습니다.
3. 인쇄 혁명 – 지식의 민주화와 사유의 확장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은 단순한 기술 발전을 넘어 지식 유통 구조의 혁명을 불러왔습니다. 앨런은 이를 “문자가 개인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 되는 순간”이라 정의합니다. 인쇄 이전의 기록은 소수의 전문가나 권력자만이 독점했으며, 대중 접근이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쇄가 대량 생산을 가능케 하면서 많은 사람이 책을 접할 기회를 얻었고, 자연스럽게 사유의 폭도 넓어졌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르네상스, 종교개혁, 구텐베르크 이후의 계몽주의로 이어지며, ‘읽고 쓰는 인간’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사회를 구축했습니다.
4. 일기와 편지 – 개인의 기록이 만드는 역사
개인의 내면을 드러내는 일기와 편지는 기록 행위의 가장 프라이빗한 형태입니다. 앨런은 이를 “나와 세계 사이를 잇는 대화”라 표현합니다. 예컨대 에밀리 디킨슨의 시 일기는 단지 하루의 기록이 아니라, 자신과 세계에 대한 질문이자 성찰의 기록이었습니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는 개인 경험을 통해 당대의 지리적, 문화적 정보를 전달한 역사 자료입니다. 이처럼 일상적이거나 사적인 기록은 후대로 전달되며, 과거를 재해석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자, ‘기록된 인간’의 가장 솔직한 초상입니다.
5. 근대의 노트북과 수첩 문화
근대 이후 노트북과 수첩 문화는 기록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켰습니다. 앨런은 이를 ‘생각의 실험실’이라고 부릅니다. 즉, 단순히 생각을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펼치고 재정리하고 다시 고쳐 쓰는 작업을 통한 사유의 확장입니다. 이는 공상 과학자, 기업가, 철학자 뿐만 아니라 현대인 누구에게나 필요한 사고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 기록 구조는 “생각이 쓰기가 되고, 쓰기가 생각으로 돌아오는 순환 구조”를 형성하며, 노트 하나가 곧 개인의 사유 자산이 됩니다.
6. 디지털 시대와 기록의 재구성
디지털 기록은 속도와 접근성 면에서 혁명적이지만, 종이 기록이 주는 ‘손의 감각’과 시간의 흐름을 담지는 못합니다. 클라우드 메모 앱은 알람과 동기화를 가능케 하지만, 그 기록은 쉽게 잊히기도 합니다. 앨런은 “디지털 기록에서 놓치는 것은 문자를 손으로 쓰며 사유와 연결되는 느낌”이라 지적합니다. 그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기록의 장점을 조화롭게 활용할 때, 기록이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사유의 매개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7. 쓰는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
‘쓰는 인간’이란 단순히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록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입니다. 앨런은 네 가지 핵심 태도를 제안합니다. 첫째, 손으로 쓸 때 몸의 감각이 사유의 연장으로 작용함을 느끼기. 둘째, 여러 장을 펼쳐 한 흐름을 구성하며 생각을 시각화하기. 셋째, 감정과 이성을 나누지 않고 기록으로 통합해 이해하기. 넷째, 주기적으로 과거 기록을 재해석하며 현재의 시각과 대화를 나누기. 이러한 실천은 기록을 넘어 사유와 창조력을 키우는 길입니다.
8. 오늘, 다시 쓰는 인간으로 사는 법
이 책은 현대 독자에게 ‘당신은 어떤 기록을 남기고 있나요?’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집니다. 디지털 시대에 기록은 많지만, 그 기록이 무엇을 말하는지, 어떻게 사유를 확장시키는지는 별개일 수 있습니다. 앨런은 종이에 다시 펜을 들기를 권합니다. 손으로 쓴 기록은 사유를 깊게 하고, 기억을 강화하며, 쓰는 인간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디지털 시대에 잃어버린 사유의 깊이를 회복하는 방법으로, 아날로그 기록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새롭게 일깨워줍니다.
9. 정리 – 기록은 결국 나를 비추는 거울
『쓰는 인간』은 기록이라는 행위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동격으로 봅니다. 모든 기록은 당신의 선택이고 성찰이며, 당신의 일부입니다. 앨런과 손성화 번역이 만난 이 책은, 다시 펜을 들게 하고, 다시 종이를 펼치게 하고, 다시 사유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결국, ‘쓰는 인간’이란 존재의 본질에 다가가는 여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