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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 오름의 동굴들, 어둠 속에서 발견하는 기억과 생명의 기록 - 초등 책 추천, 줄거리, 느낀점, 독서록

by cocoly_chae 2025. 6. 13.

정창훈 작가의 『거문 오름의 동굴들』은 제주의 용암 동굴을 중심으로 자연과 역사, 기억과 존재를 성찰하는 생태 에세이이자 철학적 사유가 담긴 탐사 기록입니다.
 

화산지형 단면과 거문오름을 그린 그림책 표지
제주도의 신비로운 화산지형을 소개하는 지식 그림책입니다. 거문오름과 용암 동굴을 생생한 단면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도서)


서론: 거문 오름의 동굴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표면 아래’를 들여다볼까요? 정창훈 작가의 『거문 오름의 동굴들』은 독자에게 단순한 지하 탐험이 아니라, 자연의 뿌리와 기억의 심층, 그리고 침묵 속에 남은 역사의 흔적을 함께 들여다보게 합니다. 이 책은 단순한 지리학적 설명을 넘어서, 제주의 용암 동굴 속으로 몸을 낮추고, 마음을 내려놓으며 기록한 체험적 생태 에세이이자, 자연과 인간, 기억과 공간을 둘러싼 깊은 사유가 담긴 문학적 여행기입니다.


거문 오름, 지상의 세계 아래에 숨겨진 또 하나의 세계

제주도의 동북쪽에 위치한 거문 오름은 수천 년 전 화산 활동으로 생성된 기생 화산입니다. 그 아래로는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용암 동굴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굴 등으로 이어지는 이 구조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을 만큼 지질학적으로도 희소성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닌 공간입니다.
정창훈 작가는 이 동굴들 속으로 몸소 들어가며, 그 안의 물리적 구조만이 아닌, 그 공간이 품고 있는 시간과 이야기, 기억의 층을 들춰냅니다. 단순한 탐방기가 아닌, 존재와 침묵, 잊힌 역사와 자연의 위엄을 마주하는 ‘내려가는 서사’로 독자를 초대합니다.


자연의 숨결을 기록한 문장들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자연에 대한 묘사가 단순한 ‘정보’가 아닌 ‘호흡’이라는 점입니다. 작가는 땅속의 냉기,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좁은 틈을 지나며 피부에 스치는 바람까지 섬세하게 기록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감각의 전달이 아닙니다. 그는 물방울이 바위를 깎는 시간 속에서 인내를 보고, 무너진 동굴 속에서 모든 구조의 유한함을 읽어냅니다.
정확한 관찰력과 시적인 감수성이 어우러진 문장은 독자에게 “자연을 보는 법”이 아니라 “자연을 듣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진실을, 책을 통해 체험하게 됩니다.


기억의 지형, 제주의 어두운 역사

『거문 오름의 동굴들』은 단순히 자연을 찬미하는 에세이에 머물지 않습니다. 작가는 제주 4·3 사건과 같은 현대사의 어두운 기억들이 이 땅에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묵묵히 언급합니다. 실제로 일부 동굴은 당시에 사람들의 은신처로 사용되기도 했고, 어떤 곳은 끝내 돌아오지 못한 생명의 흔적이 남은 공간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이를 대놓고 설명하거나 강하게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저 동굴 속 어둠과 고요함을 통해,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역사적 아픔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지질학적 ‘빈 공간’이 곧 역사적 ‘침묵’의 은유로 확장되며, 독자는 그 침묵 속에 담긴 무게를 스스로 느끼게 됩니다.


지하에서 던지는 철학적 질문들

정창훈 작가는 동굴 탐사를 단순한 체험이 아닌, 내면을 향한 탐구로 바꿔놓습니다. “왜 우리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가?” “지하로 내려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는 이러한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내리기보다는, 그 질문을 안은 채 독자를 어둠 속으로 동행시킵니다.
동굴은 동시에 피난처이자 무덤이고, 탄생의 신화가 깃든 장소이자 두려움의 공간입니다. 그는 이 이중성을 섬세하게 펼쳐 보이며, 자연과 인간, 무의식과 존재 사이의 연결 고리를 조용히 조명합니다. 그 과정은 독서라기보다 하나의 ‘명상’처럼 느껴집니다.


기록자로서의 겸손함과 체험의 진정성

이 책이 더욱 깊이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작가의 ‘태도’입니다. 그는 전지적 시점에서 자연을 해석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동굴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하고, 두려움에 몸을 움츠리기도 하며, 끝없는 어둠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그 솔직함은 독자에게 신뢰를 줍니다. 그가 전하는 문장들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기록이 아니라, 직접 발로 들어가 보고 듣고 느낀 진정성 있는 목소리입니다. 우리는 그를 따라 동굴을 걷는 동안, 단순한 관광객이 아닌 ‘자연과 삶의 공존자’로서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결론: 침묵을 듣는 책, 땅 아래에서 울리는 이야기

『거문 오름의 동굴들』은 조용한 책입니다. 하지만 그 조용함은 오래 남습니다. 그것은 단지 지질을 소개하는 안내서도, 역사만을 말하는 보고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땅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를, 그리고 그 땅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잊고 살아가는지를 묻는 책입니다.
정창훈 작가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자연은 풍경이 아니라 기억이고, 질문이며, 때로는 마지막 목격자다.” 『거문 오름의 동굴들』은 말 없는 어둠 속에서 진실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책입니다. 그리고 그 어둠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오래도록 귓가에 울리는 메아리가 되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