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를 넘나드는 한강의 실험적 작품 『흰』을 깊이 들여다보며, 이 책이 어떻게 하나의 색을 통해 상실, 기억, 존재를 시적으로 사유하고 문학적으로 승화시키는지를 고찰합니다.
서론: ‘색’ - 흰색
『흰』에서 한강은 조용하지만 근본적인 실험을 감행합니다. 이 책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의 ‘색’ - 흰색 - 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그러나 단순한 색에 대한 묘사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작품은 가장 친밀하고, 가장 침묵에 가까운 슬픔의 기록이며, 시와 산문, 명상이 뒤섞인 독특한 형식을 통해 독자의 감각과 사고를 자극합니다.
흰색이라는 구조, 그리고 주제
책은 41개의 흰색 사물 목록으로 시작됩니다. 쌀, 눈, 달, 파도, 린넨, 소금 등. 이 목록은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각각의 흰색 대상이 하나의 단락 혹은 장면으로 확장되는 이야기의 골격이 됩니다. 작가는 이 사물들을 매개로 삼아, 상실, 연약함, 아름다움, 그리고 인간의 유한함을 사유합니다.
조각난 서사와 기억의 파편
『흰』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일반적인 서사 구조를 따르지 않습니다. 대신 기억의 조각들, 감정의 잔상들, 사물에 얽힌 사유들이 파편적으로 이어집니다. 현재 시점의 화자는 유럽의 겨울 도시, 바르샤바에 머물며, 길거리에서 흰색의 흔적을 포착합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단편, 혹은 상상 속에서 살아보았을 수도 있었던 언니의 삶이 교차됩니다.
언어, 의식의 의례 그리고 저항
한강의 언어는 기도문처럼 조용하고 정돈되어 있습니다.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가 옮긴 영어판에서도 그 감정의 온도와 절제는 고스란히 살아 있습니다. 각각의 흰색 사물은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의례의 대상이 됩니다. 눈은 “중단된 희망의 가능성”이 되고, 소금은 “말라붙지 못한 눈물의 자국”이 됩니다.
“나는 그녀를 다시 죽이고, 다시 슬퍼한다.”
슬픔은 직선적이지 않으며, 계절처럼 순환한다.
도시, 기억과 명상의 공간
작품의 많은 장면은 바르샤바의 거리에서 펼쳐집니다. 전쟁과 재건의 흔적이 남은 이 도시는, 화자에게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깊은 사유의 공간이 됩니다. 차가운 공기, 흐린 하늘, 녹지 않은 눈, 오래된 건물들. 이 도시의 모든 요소가 상실과 기억, 재구성이라는 책의 주제를 반영합니다.
개인의 이야기에서 보편으로
이 작품은 작가의 개인적인 가족사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그것은 곧 확장되어 보편적 정서로 전환됩니다. 태어나지 못한 형제자매, 어린 시절 잃은 가족, 혹은 한 번도 시작되지 못한 미래에 대한 슬픔. 우리는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상실을 경험합니다. 『흰』은 바로 그 감정의 층위에 독자를 초대합니다.
쓰이지 않은 생애를 상상한다는 것
『흰』은 단순히 상실을 애도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작가는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숨을 거둔 언니의 삶을 상상합니다.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을 구성하고, 살아보지 못한 삶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그려 넣습니다. 그것은 픽션이라기보다는 애도의 확장입니다. 언니가 있었을지도 모를 순간들—걷고, 웃고, 손을 잡고, 병들고, 죽는 과정까지—작가는 그것들을 '글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다시 살아보려 합니다.
이러한 상상은 그저 개인적인 감정의 표출이 아닙니다. 인간이 망각하거나 지워버린 존재들을 문학의 공간 속에 되살리는 시도입니다. 쓰이지 않은 생애를 끝까지 감각하고자 하는 이 글쓰기의 윤리는, 독자에게도 “기억되지 못한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흰』은 개인적인 글을 넘어, 문학이 해야 할 일에 대한 물음을 던집니다.
침묵과 여백의 미학
『흰』은 단어보다 침묵이 많은 책입니다. 글의 양보다 여백이 훨씬 많은 페이지들이 반복되고, 글과 글 사이의 간극이 깊은 사유의 공간을 형성합니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지 활자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의 '쉼'과 '비어 있음'을 함께 느끼는 경험입니다.
이 여백은 단순한 편집상의 미니멀리즘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말없이 전달하기 위한 형식적 선택입니다. 슬픔은 때로 너무 명확해서, 혹은 너무 미세해서 언어로 표현되지 못합니다. 한강은 그럴 때 오히려 ‘말하지 않음’을 택함으로써, 더 깊은 감정의 깊이를 끌어올립니다. 이 침묵과 공백의 전략은 『흰』을 단지 슬픈 책이 아니라, 독자 스스로 자기 내면을 비춰보는 거울 같은 책으로 만듭니다.
지금 - 여기의 상실에 대하여
『흰』이 과거의 상실을 다루는 동시에,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상실과도 깊이 맞닿아 있는 이유는, 그 정서의 본질이 시대를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팬데믹, 전쟁, 기후 재난 등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매일의 삶 속에서 무언가를 ‘잃어가는’ 감정을 만들어 냅니다.
『흰』은 이러한 ‘지금-여기’의 상실에도 침묵으로 응답합니다. 무언가를 잃었다는 감정은 반드시 큰 사건이 아니라, 매우 일상적인 틈에서 발생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대화 속의 오해, 관계의 단절, 기회의 소멸 등. 작가는 흰색의 사물들을 통해 그런 상실의 감각을 체화하고, 그 속에 머무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급하게 치유하거나 결론 내리기보다, 조용히 바라보고 감각하는 일. 그것이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결론: 끝내지 않고 느껴야 할 책
『흰』은 전통적인 소설의 문법을 거부합니다. 이 책에는 명확한 플롯도, 결말도 없습니다. 대신, 이 책은 ‘공간’을 제공합니다. 말하지 못했던 감정을 조용히 꺼내 놓을 수 있는 공간, 고요한 상실을 함께 앉아 있을 수 있는 여백.
이 책은 서둘러 읽는 책이 아닙니다. 한 번에 끝내는 책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루에 하나의 흰 사물씩, 천천히 읽어 나가며 자신만의 감정을 함께 꺼내는 책입니다. 마치 눈처럼, 고요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잔상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