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건 작가의 문학적 중편소설 『급류』를 깊이 있게 탐구하며, 고립, 정체성, 시간의 흐름이라는 현대적 주제를 어떻게 서정적으로 풀어냈는지 분석합니다.
서론
점점 더 빠르고 단절된 세상이 되어가는 지금, 정대건의 『급류』는 고독과 감정의 관성을 묵직하게 성찰하는 작품으로 다가옵니다. 독립출판계를 통해 처음 소개된 이 중편소설은, 리듬감 있는 문체와 진심 어린 서사, 그리고 은근한 철학적 깊이로 조용한 호평을 얻고 있습니다. 정대건의 글은 큰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그저 흐릅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는 ‘강물’처럼, 이 작품은 독자의 마음속에 스며듭니다.
줄거리 한눈에 보기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개인적인 상실 이후 작은 시골 강가 마을로 짧은 여행을 떠납니다. 특별한 사건은 벌어지지 않지만, 페이지마다 기억과 침묵, 그리고 연결에 대한 갈망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는 혼자 식사하고, 강을 바라보며, 반쯤 쓰다만 메시지를 작성하는 등 평범한 순간들을 반복하지만, 그 이면엔 슬픔과 소외, 감정의 지속성에 대한 통찰이 숨어 있습니다.
정대건은 과장을 피하고 절제된 표현을 통해 이야기를 구성합니다. 감정의 격정을 드러내기보다는 분위기와 내면, 인간적인 디테일에 집중합니다. 강물이 조용하지만 멈추지 않고 흐르듯, 이 이야기도 은근한 강도로 독자의 감정 속으로 흘러들어 갑니다.
정지된 듯한 움직임의 초상
『급류』라는 제목은 여러 의미를 내포합니다. 물리적으로는 빠르고 불안정한 강물의 흐름을 가리키지만, 동시에 주인공의 내면을 휘도는 감정의 흐름—말로 표현되지 못한 슬픔과 조용한 전환—을 상징합니다. 정대건은 물이라는 이미지를 단순한 배경이 아닌 감정의 언어로 사용하며, 이야기의 리듬까지 물 흐름에 맞춰 조율합니다.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특징 중 하나는 ‘정지’의 활용입니다. 길게 묘사된 풍경, 반복되는 일상, 간결한 대화는 처음엔 미니멀하게 느껴지지만, 점차 감정의 깊이를 드러냅니다. 문학적 절제는 주인공의 내면적 불안감을 오히려 더 또렷하게 보여줍니다. 독자는 주인공의 머릿속을 설명으로 따라가는 대신, 그의 감정에 함께 ‘떠다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언어의 분위기: 서정적 슬픔의 음악성
정대건의 문체는 간결하면서도 음악적입니다. 문장은 군더더기 없이 정돈되어 있고, 리듬과 호흡이 절묘하게 조율되어 있습니다. 과장을 피한 문장 속에는 일상의 언어로 담아낸 시적 울림이 배어 있습니다. 독자는 이미지뿐 아니라 정서를 함께 느끼게 됩니다.
이 언어적 리듬은 『급류』를 시처럼 느껴지게 만듭니다. 비유와 상징은 과하지 않게 삽입되어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풍부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빗소리, 창밖 풍경, 불쑥 떠오르는 기억 등 모든 장면은 정제된 언어로 감정을 직조합니다.
일본 문학의 미니멀리즘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정대건의 글은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인물은 환상이나 초현실로 도피하지 않습니다. 대신 침묵과 반복, 일상의 의식을 통해 현실 속 감정을 조용히 마주합니다.
상실, 시간, 말하지 못한 감정들
이 작품의 중심에는 ‘상실’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죽음, 관계의 끝, 혹은 내면적 환멸. 그러나 작가는 상실의 ‘사건’보다 그 이후의 감정을 중심에 둡니다. 세상은 계속 움직이지만, 마음은 제자리인 그 시기를 세밀하게 포착합니다.
정대건은 슬픔을 소리 없이 조용한 파도처럼 묘사합니다. 울부짖지 않고, 일상의 틈새에서 서서히 스며드는 감정의 흐름을 따라갑니다. 반복되는 행동, 비워진 문장, 중단된 대화 속에서 진짜 감정이 드러납니다. 그는 독자가 스스로 감정을 느끼도록 여지를 남깁니다.
시간 역시 중요한 장치입니다. 정대건은 늘어지는 순간, 반복되는 하루를 의도적으로 배치하며 ‘의미 없는 시간’ 속에서 오히려 삶의 본질에 다가가도록 유도합니다. 단순한 사건 대신 공백과 침묵에 의미를 부여하며, 독자는 글 너머의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가게 됩니다.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
『급류』가 독자의 마음에 오래 남는 이유는 줄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야기의 ‘온도’ 덕분입니다. 이 작품은 빠름과 느림, 연결과 고립 사이에서 떠 있는 세대의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정대건은 어딘가 멈춰 있는, 그러나 확실히 존재하는 이 세대의 마음을 고요하게 묘사합니다.
짧지만, 그 여운은 길게 남습니다. 물결, 회색 하늘, 미처 전하지 못한 말들—이 이미지들은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독자의 기억 속 무언가를 건드리는 거울이 됩니다.
결론: 꼭 들어야 할 목소리
『급류』는 아직은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닐 수 있지만, 그 진정성만큼은 깊이 다가옵니다. 감정이 넘쳐나는 시대에 조용한 진실을 전하는 이 작품은, 무언가를 ‘말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전달합니다. 정대건은 해답을 제시하지 않지만, 함께 있어주는 글을 씁니다. 때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혹시 당신도 무언가에 떠밀리듯 흘러가고 있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이 책은 그런 당신을 위한 이야기입니다.